고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최충(崔沖, 984~1068)이라는 이름이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최충은 학교 교육의 아버지였다. 그가 세운 9재학당은 사학교육의 원조였고, 고려시대 문신 배출의 산실이었다. 최승로가 유교적 정치개혁에 공헌한 인물이라면, 최충은 유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인물을 배출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세운 9재학당이 과거시험 합격을 위한 입시 교육장이었다는 비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 유교 경전에 바탕을 둔 그의 학문 교육은 유학이 꽃피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글짓기를 좋아하던 소년이 고려 최고의 재상이 되다
문종 대 고려 유학(儒學)을 꽃피우게 한 최충은 984년 해주 최씨 최온(崔溫)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자는 호연(浩然)이다. 부친인 최온은 향리 출신으로 해주 최씨 시조로도 올라 있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최충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글짓기를 잘했다. 또 풍채가 뛰어나고 성품과 지조가 굳건했다. 1005년(목종 8년)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최충은 과거시험에서 갑과(甲科) 1등으로 합격한 뒤 벼슬길에 나아갔다.
최충이 관료로 진출하는 데는 최항이 깊은 영향을 끼쳤다.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할 때 최항이 지공거였다. 지공거는 과거시험 집행관으로 지공거와 합격자들은 좌주(座主)-문생(門生)이라 하여 유대관계가 돈독하였다. 게다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후계자로 정하려는 역모를 일으켰을 때, 최항이 이를 진압하고 현종 즉위에 공을 세우면서 최충의 관료 생활은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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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은 관료생활 동안 현종·덕종·정종(靖宗)·문종에 이르는 네 명의 왕을 섬겼다. 재상이 되자 법률관을 동원하여 기존의 율령을 개정하고 서산(書算)을 고정하는 작업과 형법을 정비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등 제도정비에 주력하였다. 문종 대에 이루어진 수많은 법제도의 정비는 사실상 최충이 재상 시절에 일궈낸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상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느낀 최충은 1053년(문종 7년) 문종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를 결심했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 그러나 40여 년에 걸친 기나긴 벼슬생활을 마감한 노재상의 앞에는 또 다시 후진양성이라는 새로운 사명이 놓여 있었다.
사학의 원조 9재학당을 설립하다
최충이 활동하던 문종 초기는 거란의 침입과 전화가 아물고서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중앙 정부가 교육까지 돌아볼 여력은 없었다. 중앙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은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지방의 향학은 갖추어지기 이전이었으므로 교육에 대한 새 바람이 절실하던 때였다.
국자감의 부실한 교육여건을 목격한 최충은 세인들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하여 자신의 집에 사숙을 열고 제자들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학도들로 그의 학당은 금세 문전성시를 이뤘다. 최충은 교육 장소를 송악산 아래 자하동에 마련했는데 모여드는 학도가 너무 많아 인근 거리까지 넘칠 정도였다. 넘치는 학생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9재학당이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학생이 몰려든 것은 최충의 명성 탓이기도 했지만, 그가 활동하던 문종 초기에 문반 현직자를 우대하는 정책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더욱이 왕실과 더불어 외척 세력이 부상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기 위한 실력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해야만 했다. 그가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워진 9재는 악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 9개로 분류되었는데, 이것은 진학의 순서와도 관련이 있었다. 초학자는 먼저 악성재에 들어가 6예를 익히고 다음 순차적으로 여러 재를 거쳐 마지막에 대빙재에서 수학함으로써 졸업하는 것이다. 9재학당의 교과서는 9경과 삼사였다. 9재에서의 교육은 아직 철학적인 궁리(窮理)의 공부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고, 9경 3사를 중심으로 한 과거시험을 위한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9경 3사가 어떤 과목이었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학계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대개 9경은 [주역]∙[서경]∙[시경]∙[의례]∙[주례]∙[예기]∙[춘추좌씨전]∙[공양전], 3사는 [사기]∙[한서]∙[후한서]인 것으로 보고 있다.
서당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학은 최충이 세운 9재학당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을 그림 김홍도의 '서당도'.
절도와 장유의 도를 가르친 각촉부시
최충은 9경 3사를 중심으로 학도들의 최대 희망이기도 한 과거시험 교육에 매진했지만, 이와 함께 시와 문장을 가르치는 일도 빠트리지 않았다. 최충은 여러 번 지공거(知貢擧)를 거쳤으므로, 과거에 응시하려는 학도는 먼저 최공도에 끼어 공부하기를 소원하였다. 매년 여름철에는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여름학기 강습을 운영해야 될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최충은 간혹 이름난 선비들이 찾아오면 여러 제자와 더불어 초에 금을 그어놓고 그 금까지 타기 전에 시를 지어 읊는 ‘각촉부시(刻燭賦詩)’라는 시 짓기 대회를 열어 성적대로 차례로 앉히고 술잔을 돌리는 행사도 열었다. 각촉부시가 진행되는 동안은 그야말로 진퇴의 절도와 장유의 서열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종일토록 수창(酬唱)하는 모습이 질서 정연하고 의식을 갖추었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최충의 교육사업은 큰 반향을 일으켜 과거 볼 사람은 저마다 먼저 그의 학도가 되기를 원하였으며, 그의 모임을 모방하여 개경에만도 11개소, 전국에 12개의 사학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에 최충의 학도가 가장 권위가 있었으며 성황을 이루었다.
여러 차례의 지공거를 거친 최충의 문하에는 과거시험에서 합격하고자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한국 사립학교의 원조이자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던 최충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임에도 그의 시문은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무신란 이후 문신이 많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최충의 9재학당에서 배운 학도들의 명성은 국학인 국자감을 능가하여 여기서 공부한 학도들은 최충의 벼슬 이름을 따 흔히 ‘시중 최공도’라 일컬어졌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렸다.
은퇴한 이후로 사학 발전에 온 힘을 기울인 최충도 노쇠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살아 생전 최충은 평소 두 아들 최유선과 최유길에게 권력보다는 학문의 길에 종사하라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했다.
“선비가 세력에 빌붙어 벼슬을 하면 끝을 잘 맺기 어렵지만, 글로써 출세하면 반드시 경사가 있게 된다. 나는 다행히 글로써 현달하였거니와 깨끗한 지조로써 세상을 끝마치려 한다.”
최충의 유언대로 최사추 등 자손 수십 명도 이후 모두 학자로서 재상에 올랐으니 최충은 자손들의 교육에도 성공한 인물이었다.
동방의 해동공자, 인색한 평가를 받다
최충은 일명 ‘해동공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가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듣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니라 9재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몸소 육예(六藝)에 능통한 자가 70여 명이었다고 한다. 최충은 9재를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에 공자와 견주어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최충의 사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최충을 단지 과거시험 교육에 전념한 학자로 이해하였고, 또 불교 문자를 썼다는 이유로 그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동방 성리학의 비조로 정몽주를 높이 평가하여 문묘에 배향한 것에 비하면, 초라한 평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방 학교의 흥함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를 단지 교육에 공이 있는 인물로만 평가하였던 것이다.
최충이 그나마 서원에 배향될 수 있었던 것은 최초로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에 의해서였다. 1551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고적(古蹟)을 탐방하던 중 최충의 고향인 해주 수양산 잡초 덤불 속에서 그의 사당을 발견한 것이다. 주세붕은 폐허가 된 사당의 누추한 모습에 한탄하며 그곳에다 수양서원(首陽書院:文憲書院)을 세우고 최충을 배향하였다.
글 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글쓴이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